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탈리아 왕국(신성 로마 제국) (문단 편집) === 베렝가리오 1세와 람베르토 === 아르눌프가 이탈리아에서 떠나고 교황 [[포르모소]]도 죽자 [[람베르토]]는 다시 이탈리아에 실권을 잡기 시작하고, [[베렝가리오 1세]] 역시 아르눌프의 그늘에서 벗어나 권력을 잡는다. 람베르토와 베렝가리오 1세는 아르눌프가 임명한 관리들을 모조리 살해하고, 부왕 라톨도는 동프랑크로 도망친다. 새 교황으로 즉위한 [[스테파노 6세]]는 처음에 아르눌프를 지지했지만 결국 람베르토를 지원하게 된다. 결국 이탈리아에는 이 둘이 군림하게 된다. 베렝가리오 1세는 아다강과 포강 사이 일대를, 람베르토는 나머지를 가지기로 하고 베르가모는 공동으로 통치하였다. 람베르토는 또한 베렝가리오 1세의 딸 기셀라와 결혼하기로 하여 정략결혼 동맹을 맺기를 시도한다. || [[파일:Jean_Paul_Laurens_Le_Pape_Formose_et_Etienne_VII_1870.jpg|width=100%]] || || 장 파울 라운렌스 作, 1870년 || 람베르토는 어머니 아젤트루데와 함께 다시 [[로마]]를 방문한다. 람베르토와 아젤트루데는 자신들에 대항했던 포르모소에게 보복을 가하고자 하였고 이는 교회 역사상 가장 끔찍한 재판으로 이어진다. 람베르토의 후원으로 교황 자리에 오른 스테파노 6세는 람베르토의 복수극을 실행해줘야 했는데, 포르모소의 시신은 무덤에서 꺼내져 피고석에 앉혀졌고 그가 행한 모든 사제 서품은 무효로 만들었으며 그가 교황이 되기 전 치죄받은 모든 죄목이 재차 유죄로 판결되었다. 판결에 따라 포르모소의 시체에서 교황의 법복을 벗겼고 오른손 손가락 세 개가 베어진 후 테베레강에 버려진다. 그러나 시체 시노드에 대한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평민이 스테파노 6세와 람베르토가 교황의 시신을 모욕했다며 반란을 일으키고 결국 스테파노 6세는 이 반란으로 퇴위당한다. 람베르토는 [[라벤나]]에서 제국 의회를 소집하여 자기를 적법한 신성 로마 황제로 인정하고 아르눌프의 이탈리아 국왕 즉위를 무효로 해달라 하였다. 새로 즉위한 교황 [[요한 9세]]는 의회에서 람베르토의 뜻에 거슬러 포르모소의 신원을 회복시키며 시체 시노드의 판결을 뒤집는다. 의회의 성직자들은 스테파노 6세의 재판과 성직자 회의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그 교령들을 파기하고, 스테파노 6세에게 폐위당한 성직자들을 복권시킨다. 람베르토는 정책과 제도 제정에 힘썼다. 람베르토는 아버지 [[귀도 3세]]의 '새로운 프랑크 왕국(Renovatio Francorum)'이라는 정책과 선대 프랑크 국왕들의 법령을 계승하였다. 그리고 람베르토는 [[로타리우스 1세]]의 '로마 헌장(Constitutio Romana)'도 부활시켰는데, 교황 요한 9세는 로마 헌장을 다시 승인하여 교황 선출 때 황제의 사절을 의무적으로 참석하도록 확정하였다. 람베르토는 아버지 귀도 3세의 정책을 명문화한 '우티넨시스 로마법(Lex Romana Utinensis)'을 제정하였다. 한편, 베렝가리오 1세는 협정을 깨고 수도 [[파비아]]를 점거하지만 람베르토에게 패배하고 포로로 붙잡힌다. 그러던 중 람베르토가 사냥 중에 낙마하여 죽자 베렝가리오 1세는 파비아를 확보하고 이탈리아의 단독 국왕이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